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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 김용진(金容鎭)-구한말, 일강기에 화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긴 김용진의 간찰

200,000원


013 김용진(金容鎭)-구한말, 일강기에 화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긴 김용진의 간찰

200,000원

* 크기는 12.5-23.5센티

상태는 봉투에 찢겨져 약간 흠이 있다.  

 


김용진(金容鎭)
1878(고종 15)∼1968. 서화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구(聖九), 호는 영운(穎雲)·향석(香石)·구룡산인(九龍山人). 특진관(特進官) 흥규(興圭)와 대원군의 외손녀인 임천조씨(林川趙氏)의 3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참판 정규(貞圭)의 양자로 들어갔다.

양조부인 병국(炳國)이 영의정을 지내는 등 당시의 세력층인 안동김씨 문중을 배경으로 자라난 그는 한말에 세마(洗馬)·수원군수 및 내부(內部)의 지방국장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905년 무렵 관직을 떠난 뒤에는 서화에만 전념하였다.

1949년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國展) 서예부 심사위원과 고문으로 활동하였으며,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의 명예회장과 한국서예가협회의 고문을 역임하였다. 글씨는 안진경체(顔眞卿體)의 해서와 한예(漢隷)에 바탕을 둔 예서 및 고격한 행서를 주로 썼다.

그림은 매·란·국·죽(梅蘭菊竹)의 사군자와 수선화·모란·등꽃·연꽃·장미 등의 문인화(文人畵)를 즐겨 그렸다. 문인화 수법은 근대 중국 문인화의 거장인 오창석(吳昌碩)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묵란(墨蘭)과 묵죽(墨竹)에서는 민영익(閔泳翊)의 필법과 감화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만년에 이르러 많이 그렸던 꽃그림들에서 볼 수 있는 풍부한 색채구사와 전통적 품격의 필치는 그의 독자적인 수법이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마지막 문인화가였다. 1956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수상하였다.